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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칭찬에 인색한 사람들
기사입력: 2008/12/12 [09:32]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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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돈만 울산문인협회 회장
     
안녕하셨습니까? 설레발이입니다.
  칭찬을 하면 고래도 춤을 춘다는 말이 있고, 무조건적인 칭찬은 이기적인 아이를 만든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란 비판보다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거는 인지상정입니다.
  어려운 창작을 하는 예술인에게 뜨거운 칭찬은 또 다른 창작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독일의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 중  깊이에의 강요'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평론가가 한 젊은 여류화가의 작품을 보고 "깊이가 없다"라고 평을 했습니다. 여류화가는  깊이'가 무엇인지 찾다가 좌절하여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무책임하게 무심히 던진 한 비평가의 한 마디가 아까운 한 여류화가를 죽인 셈입니다.
  며칠 전에 공연된  뮤지컬, 태화강'에 대해 "그게 창작이냐, "재탕이다.", "주제가 선명치 않다"등 비판이 많았습니다.
  비판이 많다는 거는 그 만큼 관심이 많다는 걸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이라는 게 우정 어린 비판의 수준을 넘어선다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필자는 뮤지컬을 모릅니다. 악보를 보고 노래도 부를 줄 모릅니다. 모르니까, 뮤지컬이 어쩌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평생을 언론에 몸담아 왔기에 기자들의 보도 자세에 대해서는 좀 안다고 자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뮤지컬, 태화강'에 대한 보도를 보면 좀 안타까운 점이 하나둘 아닙니다.
  하나만 지적하면, 막연하게 어떤 원로의 말에 의하면  이래 말 하더라', 어떤 관객은  이래 평 하더라'는 식의 애매모호한 평을 하던 시대는 넘어갔다고 생각합니다.
  문화계 원로 선생 아무개의 말에 의하면  이래 평 하더라', 아니면 남구 무거동에 사는 아무개 아저씨는  이런 식으로 말 하더라'는 등 구체성이 있어야 그 기사를 믿을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어떤 원로니 어떤 관객을 예로 드는 것은 기자 자기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뮤지컬의 전문가가  뮤지컬, 태화강'을 보고 평을 했더라면, 우리는 그의 전문성을 믿기 때문에 그 평을 받아들입니다. 비전문가가 전문분야를 평하는 거는 자칫 평에 허점이 드러나 말썽의 소지가 될 수도 있어 늘 주의가 요합니다.
  물론 화가가 아닌 사람이 전시회에서 그림을 보고 자기 느낀 점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 한 개인의 의견 내지 느낌입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언론계의 평은 미래지향적이고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진정한 소금 역할을 해야 합니다.   비평에 감정이 개입되면 소금이 소금 맛을 잃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번  뮤지컬, 태화강'의 평을 보고 필자는 또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가 졸작  원줄과 목줄' 바다낚시 소설을 단행본으로 낼 때, 울산의 J출판사에다 출판을 의뢰하자 서울의 S출판사 사장이 "지방에서 출판을 하면 책이 잘 안 팔릴 걸"하고 우려를 했습니다. 나는 고집스레 울산에서 책을 냈습니다.  
  요새도 울산작품 이라면 무조건 깔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별거 아닌 거라도 서울서 내려왔다 하면 졸작도 대작으로 보는 선입감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뮤지컬, 태화강'에도 이 선입감이 작용했을까? 이런 걸 생각하면 참으로 우울합니다.   어려운 문제는 이 정도로 합시다.
  이번에 출연한 1백50명의 단원들에게 고생했다고 칭찬을 좀 해줍시다. 들리는 말로는 강도 높은 비평에 단원들이 그만 축 쳐져있다 합니다.
    명성왕후',  장보고' 같은 대작이 영글기까지는 10년 세월이 흘렀답니다.  뮤지컬, 태화강'이 제대로 흘러가도록 우리도 좀 기다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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