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셨습니까? 설레발이입니다.
칭찬을 하면 고래도 춤을 춘다는 말이 있고, 무조건적인 칭찬은 이기적인 아이를 만든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란 비판보다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거는 인지상정입니다.
어려운 창작을 하는 예술인에게 뜨거운 칭찬은 또 다른 창작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독일의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 중 깊이에의 강요'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평론가가 한 젊은 여류화가의 작품을 보고 "깊이가 없다"라고 평을 했습니다. 여류화가는 깊이'가 무엇인지 찾다가 좌절하여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무책임하게 무심히 던진 한 비평가의 한 마디가 아까운 한 여류화가를 죽인 셈입니다.
며칠 전에 공연된 뮤지컬, 태화강'에 대해 "그게 창작이냐, "재탕이다.", "주제가 선명치 않다"등 비판이 많았습니다.
비판이 많다는 거는 그 만큼 관심이 많다는 걸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이라는 게 우정 어린 비판의 수준을 넘어선다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필자는 뮤지컬을 모릅니다. 악보를 보고 노래도 부를 줄 모릅니다. 모르니까, 뮤지컬이 어쩌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평생을 언론에 몸담아 왔기에 기자들의 보도 자세에 대해서는 좀 안다고 자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뮤지컬, 태화강'에 대한 보도를 보면 좀 안타까운 점이 하나둘 아닙니다.
하나만 지적하면, 막연하게 어떤 원로의 말에 의하면 이래 말 하더라', 어떤 관객은 이래 평 하더라'는 식의 애매모호한 평을 하던 시대는 넘어갔다고 생각합니다.
문화계 원로 선생 아무개의 말에 의하면 이래 평 하더라', 아니면 남구 무거동에 사는 아무개 아저씨는 이런 식으로 말 하더라'는 등 구체성이 있어야 그 기사를 믿을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어떤 원로니 어떤 관객을 예로 드는 것은 기자 자기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뮤지컬의 전문가가 뮤지컬, 태화강'을 보고 평을 했더라면, 우리는 그의 전문성을 믿기 때문에 그 평을 받아들입니다. 비전문가가 전문분야를 평하는 거는 자칫 평에 허점이 드러나 말썽의 소지가 될 수도 있어 늘 주의가 요합니다.
물론 화가가 아닌 사람이 전시회에서 그림을 보고 자기 느낀 점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 한 개인의 의견 내지 느낌입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언론계의 평은 미래지향적이고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진정한 소금 역할을 해야 합니다. 비평에 감정이 개입되면 소금이 소금 맛을 잃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번 뮤지컬, 태화강'의 평을 보고 필자는 또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가 졸작 원줄과 목줄' 바다낚시 소설을 단행본으로 낼 때, 울산의 J출판사에다 출판을 의뢰하자 서울의 S출판사 사장이 "지방에서 출판을 하면 책이 잘 안 팔릴 걸"하고 우려를 했습니다. 나는 고집스레 울산에서 책을 냈습니다.
요새도 울산작품 이라면 무조건 깔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별거 아닌 거라도 서울서 내려왔다 하면 졸작도 대작으로 보는 선입감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뮤지컬, 태화강'에도 이 선입감이 작용했을까? 이런 걸 생각하면 참으로 우울합니다. 어려운 문제는 이 정도로 합시다.
이번에 출연한 1백50명의 단원들에게 고생했다고 칭찬을 좀 해줍시다. 들리는 말로는 강도 높은 비평에 단원들이 그만 축 쳐져있다 합니다.
명성왕후', 장보고' 같은 대작이 영글기까지는 10년 세월이 흘렀답니다. 뮤지컬, 태화강'이 제대로 흘러가도록 우리도 좀 기다려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