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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영의 ‘클래식 음악’ 산책
로베르트 슈만의 명성에 묻힌 천재음악가, 클라라 슈만
기사입력: 2019/04/12 [09:37]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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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영/음악칼럼니스트     ©UWNEWS

우리는 “슈만과 클라라”라는 이름을 한번쯤 들어봤을지도 모른다. 음악계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이자 큰 스캔들을 불러왔던 주인공들이라 클래식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클라라와 나의 인연은 훨씬 깊다. 그 이유는 독일에서 6년간 살았던 동네 이름이 클라라 슈트라쎄 (Klara strasse)였기 때문이다. 주소를 쓸 때마다 읊어 대던 이름이었으니 어느새 클라라라는 이름은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대학원 1학기에 만난 나의 첫 리포트 과제가 슈만의 가곡이었다. 그것은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에 작곡된 곡이었는데, 공부를 하며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고, 또 첫 과제라 정말 열심히 준비했던 기억이 있다. 

 

 클라라는 원래 천재 피아니스트였다. 슈만의 스승이던 프리드리히 비크의 딸로서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인정받아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그랬던 그녀가 9살 연상에 그것도 무명이던 음악가 슈만과 결혼을 하려 하였으니, 딸의 장래를 염려하였던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지금이야 작곡가로서 슈만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의 슈만은 피아노 실력은 클라라보다 못하고 작곡가로서도 아직 무명이던 시절이었다. 

 

 결혼을 하기위해 여자 친구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스승이던 사람과 법적 공방까지 벌인 사람은 슈만이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사랑을 쟁취한 커플이어서 그런지 그들의 사랑은 몇 세기가 지나도 음악계에서 회자되고 있다. 

 

 슈만은 원래 어머니의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 법대에 입학했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망이 커서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한다. 비크의 제자로 피아노 기술을 연마하던 중 손가락 부상으로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자 작곡의 길로 들어선다. 작곡을 하면서 음악 비평과 글을 써 음악잡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브람스와 쇼팽 그리고 슈베르트의 음악적 가치를 처음 알아보았던 사람도 슈만이었다. 음악적 재능은 물론 지적인 능력까지 갖춘 그는 오늘날까지 음악계의 지성으로 손꼽힌다. 

 

 클라라도 결혼 후에 작곡을 하여 몇 개의 가곡집과 피아노 소품 등을 남겼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여성에게 보수적이었다. 여성의 가장 큰 미덕은 남편을 잘 섬기고 아이를 기르는 것이 다인 시대였기에 작곡가로서 입지를 다지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작곡 보다는 피아노 연주와 가르치는 일에 집중 하였던 그녀도 결혼 생활 후에 찾아온 삶의 변화를 때때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던 것 같다. 자신의 연주보다는 가족의 안위에, 그리고 남편의 음악적 활동을 위해 내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를 살면서도 감출 수 없었던 그녀의 천재적인 음악성과 독보적 활동은 몇 세기가 흘러서야 선구적인 여성음악가로서 재조명 되고 있다. 

 

 그들은 8남매를 두었고, 젊은 나이에 매독과 우울증을 앓던 슈만은 정신병으로 힘든 노년을 보내다 결국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남편이 떠난 후에도 그의 곡을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한 사람은 클라라 슈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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