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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노익희)
[편집국장 컬럼]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감동의 ‘애국가’가 울려 퍼지던 11월의 감회
기사입력: 2016/11/21 [22:10]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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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WNEWS 편집부

 

▲ 노익희 편집국장     © UWNEWS



[울산여성신문 편집부] 며칠 전 광화문에 서울시민들 100만여 명이 모였다. 4차 집회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게 경찰도 시민들도 한 건의 충돌 없이 평화적인 집회가 되었다고 한다. 30년전 반독재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때 최루탄과 각목이 난무 했지만 10만여 명에 불과한 시민들이 산발적으로 모이고 흩어지고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 때의 시위와는 천양지차가 있는 집회라고 말할 수 있다.

    

100만 여명이나 모였던 그 자리에 평생 음악만으로 인생을 구가해 온 가수 전인권이 만들어 낸 평화의 노래는 울분으로 분노로 가득 차 있던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 주기에 충분했다. 한 초등생은 ‘야, 듣고 있냐? 나 게임레벨 높여야 하는데 오늘 이 자리에 나왔다’는 외침부터 노령의 어르신이 ‘세금 다 내고 성실하게 살아 왔는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했다’며 뱉어낸 원망까지 밀리고 밀리던 시민들의 저 밑바닥 슬픔을 특별한 삶을 살아 온 가수에게 큰 위로를 받게 되었다.

    

위로하고 위로받기 위해 나온 그는 전 국민이 감동을 받았던 박세리의 벙커샷 노래로 유명한 ‘상록수’를 목마른 외침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우리 나갈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눈물을 흘리고 감동 받던 이들은 이내 두 손을 꼭 잡고 요즘 청년들에게 가장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는 ‘걱정 말아요 그대’를 들으며 촛불을 높이 들고 있었다. 그리고 흘러나왔던 무반주에 육성으로만 부르던 우리의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행진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행진 대한사람 대한으로 우리나라 만세 그리고 행진’ 잘 갈고 갈려 쇳물을 녹이고 녹여 만든 그의 목소리는 이내 모든 이의 마음을 적시고 적셨다.

    

정치가와 정치꾼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다. 정치가는 나라를 생각하고 당선이 되고부터 정치를 시작한다. 재선이나 더 큰 자리의 욕심은 없다. 그리고 나라와 국민의 파수꾼으로의 길을 걷는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논조를 가지고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당함을 추구하면 만족 해 하고 외로운 길을 걷는다. 시민의 물결 속에는 그런 정치가들이 있었다.

    

자기 결정과 판단의 최후의 심판자는 결국 자기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정치가다. 정치꾼은 당선이 되자마자 즉시 다음 선거를 준비한다고 한다. 그들의 목표는 간결하다. 차기당선을 위한 행보, 바로 그는 장사꾼이다. ‘누가 누구를 평하고 판단한단 말인가? 정통하지 않고 통찰력이 없는 사람들이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사이에 우리는 핍박받고 소외 당하고 복구하기 어려운 피해를 보고 있다. 금수강산 전역에 동서와 남북 모든 부문에서 장사꾼들의 놀음에 놀아 나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대표’와 ‘책임’이라는 핵심 원리를 지켜나간다고 한다. 지역 봉사단체 선거든 나라의 선거든 그 원리에 따르면, 박근혜나 트럼프의 당선은 철저히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이뤄졌었다. 트럼프의 저급한 개인 성향, 과격·폭력적 공약 등이 문제였을지언정, 대의민주주의라는 틀 자체는 완벽하게 지켜졌다. 그런 이유로 ‘지지자 대 지지자’라는 구도가 형성되고, ‘샤이 트럼프’나 ‘샤이 박근혜’라는 계층도 존재하는 것이다. 지지하면서도 지지하는 것을 숨기고 있는 괴로운 5%의 지지자들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과 함께 민주주의라는 틀 자체를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선거를 통해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멋대로 ‘최순실’이라는 개인에게 재 위임함으로써 대통령의 권위와 대표성을 상실하고 책임에서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민주주의의 두 축을 통째로 부정했다.

    

인간은 자기의 잘못을 아는 존재라고 정의한다면 반대의 경우는 동물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잘못을 못 뉘우치면서 끝내 나의 왕국, 나의 신하, 나의 국민이라는 말도 안 되는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논리로 5000만 위대한 대한미국 국민을 우롱하고 기망한다면 과연 그를 무엇으로 규정짓겠는가?

    

가수 전인권의 노래를 들으며 눈시울을 적시고 불의에 항거하고 부정에 통탄하던 이들의 얼굴이 눈앞에 선연하다. 그들은 모두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하느님의 보우심이 필요하다’라고. /울산여성신문 UWNEWS 편집국장 노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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