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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죽음 직전에 남긴 감동스런 유언 총집합
기사입력: 2006/02/25 [15:01]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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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석 기자
<명사들의 유언> 세계 유명인사들은 어떤 유언을 남겼나?
 
 
 

▲안중근  의사   ©브레이크뉴스

사람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진리다.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 또한 진리이다. 그러나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것이 진리라 한다면 죽는 것 또한 진리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제각기 유언을 하게 된다. 살아 있을 때 나름대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죽을 때 어떤 유언을 했을까?
삶을 다 소모하고 죽음으로 가기 직전에 남기는 유언 속에는 그 사람의 인생관과 사상, 후회와 회개, 살아 있는 사람에게 남기는 부탁들이 담겨져 있다. 세계 유명 인사들의 유언을 한데 모아 본다.(무순)
▲키에르케고르: 실존철학의 창시자인 그는 척추병에 걸려 1855년에 죽었다. 그는 "폭탄은 터져서 주위에 불을 지른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비트겐시타인: 분석철학의 제1인자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전립선암으로 62세에 삶을 마쳤다. 죽기 며칠 전에 의사로부터 곧 죽는다는 말을 듣는 자리에서 "좋습니다. 나는 멋지게 한 세상을 살고 간다고 나의 친구들에게 전해 주십시오"라고 마지막 말을 했다.
"마음이 편안할 뿐이다"
▲왕양명: 양명학의 완성자로 불리는 그는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 제자들이 유언으로 남길 말이 있느냐고 묻자 "이 마음이 광명 하니 무슨 말을 하겠느냐? "고 응답했다.
▲서경덕: 기일원론자인 그는 57세에 임종을 맞이했다. 제자가 "선생님, 이 자리에서의 생각이 어떠십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죽고 사는 이치를 이미 알고 있는지 오래이다. 마음이 편안할 뿐이다" 라고 말한 후 세상을 떴다.
▲증자: 대학, 효경의 저자인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뚱이와  머리털과 피부를 손상하지 않으려고 무척 근심하고 살아 왔다. 그런데 이제 죽을 것이니 그 걱정을 덜게 되었다."
▲소크라테스: 죽마고우인 크리톤이 "탈옥하라"고 말하자 "국가의 법률이 지금 나를 향하여 죽으라고 명령하였다. 설사 국법이 옳지 않다 하더라도 이를 배신할 수 없다.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라면서 사약을 들이켰다. 악법도 법이라는 그의 유언을 그 후 명언이 되었다.
▲칸트: 근대 관념론의 창시자인 칸트는 친구가 권하는 포도주 한잔을 마시고 "이것으로 족하다"면서 돌아 올 수 없는 세상을 떠났다.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그는 "자, 이제 출발해야지"라고 중얼거리며 다시는 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라이프니츠: 독일 철학의 원조인 그는 "한 시간을 잃을 때마다 생애의 일부가 파멸한다"고 써 놓고 눈을 감았다.
▲토마스 아쿠나스: 신학대전의 저자. 그의 주검 곁에는 다음과 같은 유서가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쓴 것은 내가 본(계시)에 비하면 털끝 만큼에 불과하다"
▲니이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외쳤다. 56세 때 매독에 걸려 삶을 마감했다.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나는 신이다. 그러나 변장하고 있는 것뿐이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예수: 골고다에서 십자가형으로 사형 당한 예수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었다. 이때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마지막 설교였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요한 12-15)"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
▲석가: 80세 때 파바라시가에서 제자 춘다의 공양을 받고 열반했다. 이때 제자들이 눈물을 흘리자 다음과 같이 위로했다.
"울지 마라. 가까운 사람과 언제나 헤어지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인연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마호메트(이슬람교 교조): 그는 부인 아이샤에게 "집에 있는 것은 다 구호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주시오"라고 부탁하고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으니라"며 숨을 거두었다.
▲존 칼빈(종교 개혁자): 그의 아래와 같은 유언은 종교개혁자 다웠다.
"사람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게 없다. 목숨이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붙어 있는 것뿐이다."
▲이청담 스님(전 조계종 종정): 그는 제자들에게 "나는 다시 태어나도 승려의 길을 택하겠다.. 육신은 변해도 법신은 살아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슈니 요셉 신부: 한국에 와서 나환자를  돌본 그는 "내가 죽으면 나를 땅에 묻은 다음에 내 묘 위에 나무를 두 그루 심어서 그 나무가 잘 성장한 다음엔 집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나환자를 위하여 집을 짓는데 써 주시오"라고 말했다. 자신의 몸을 빨아먹고 자란 나무로 나환자들의 집을 지어 주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서서평(간호원 선교사): 옆에 있던 브라운이란 사람에게 "호흡만 거두면 시체를 해부하여 연구 자료로 삼으시오"라고 부탁하고 다시는 뜰 수 없는 눈을 감았다.
▲박중빈(원불교 교주): 1943년 6월 1일 열반한 그는 5월 16일 법회 때 "그대들이 나의 법을 붓으로 쓰고 입으로 말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나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사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니라"라고 당부했다.
▲김교신(무교회주의자): 발진티푸스에 걸려 44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제자 안경득에게 "이 백성을 참 착한 백서이요, 불쌍한 민족입니다. 그들에게는 말이나 빵 보다는 따뜻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제 누가 그들을 그렇게 불쌍한 무리로 만들었느냐 묻기 전에 이제 누가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느냐가 더 급한 문제로 되어 있습니다. 안의사, 나와 함께 가서 일합시다"고 말한 후 일어서려다 운명의 시간과 마주쳤다.
"모든 것을 용서한다"
▲페스탈로치: 위대한 교육자였던 그는 명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이제 영원한 평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이 마당에 나는 나를 훼방했던 모든 것을 용서한다."
▲김활란(전 이대 총장):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으며, 독신생활로 생을 마쳤다. 그는 "육체가 없어졌다고 해서 나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장례식을 해주는 것은 절대로 싫다. 친척 친구들이 원한다면 더욱 화려한 승리의 길로 나를 환송해 주는 환송 예배를 장례식 대신 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부모, 형제, 동서양의 수많은 스승, 형제 친지 동지들에게 빠짐없이 큰사랑의 빚을 지고 간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약연(민족 교육가): 그는 눈감기 전에 한마디를 남겼다.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
▲이율곡:10만 양병설을 주장한 그는 문병온 정철에게 "사람을 채용하는데 편중하지 말라"고 말로 영원한 이별사를 대신했다.
▲황진이: 기생으로 명시조를 많이 남긴 황진이는 "나 때문에 천하의 남자가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지 못했으니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시체를 동문 밖 모래터에 그냥 내쳐 두어 개미와 벌레들이 내 살을 뜯어먹게 함으로써 천하 여인들의 경계로 삼아라"라는 별난 유언을 했다.
▲김소월(시인): 그는 1934년 12월24일 다량의 아편을 먹고 세상을 작별했다. 은사인 김억에게 유시 성격의 시(산수갑산).를 써 보냈다.
"산수갑산 어디 메냐. 내가 오고 내 못 가네. 다 내 고향, 아하 새더라면 떠나가리"
▲채만식(소설가): 제자인  시인 장영창에게 말했다.
"소 달구지를 크게 만들어 몰고 다니면서 거기에서 취사하고 라디오를 틀어 놓고 전국을 둘아 다니면서 글을 쓰고 싶다"
▲톨스토이(러시아의 대문호): 그는 1910년 11월6일 딸 세료오자를 부르며 "나는 진리를 사랑하고 있다. 대단히 진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중얼거렸다.
▲홍난파(음악가): 그의 부인에게 말했다. "숨이 끊길 때까지 베토벤과 차이코프스키의 관현악을 들려주오"라고.
▲이상: 그는 비극적인 시인이었다. 그가 죽기 하루 전에 아버지가 죽었고, 그날 저녁에 그 충격으로 할머니가 죽었다. 사상 혐의로 동경에서 체포된 그는 감옥에서 병을 얻었다. 1937년 4월17일 오전 4시 레몬 향기를 맡으며 "좋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방정환: 그는 어린이날을 만든 장본인. 동요 작가 윤석중에게 "나는 가오. 부디 일 많이 하시오"라고 말했다.
"증오의 철학을 익혔다"
▲김소운: 수필가였던 그는 평소에 "임종 직전 내가 아끼던 독한 술 한 병을 뒷 주머니에 꿰어차고
힘이 다할 때까지 높은 산을 오르겠다. 오르다가 주기 직전에 독한 이 술을 한잔 마시면서 생을 마치겠다. 그러나 과연 내가 몇 부 능선에서 죽을지 궁금하노라"고 말했다. 그는 1981년 11월2일 작고했다. 생의 마지막 수필에서 "내 뜻을 남이 못 알아준다는 것은 슬픈 일이요, 억울한 노릇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생에 절망할 까닭은 없다. 오해도 비난도 없는 인생-. 그런 인생은 아마도 멋없고 심심한 인생이리라. 맵고 짜고 쓰고 달고-그것이 인생의 참 맛이 아니겠는가."라고 썼다.
▲이은상: 민족 시인이었던 그는 1982년 9월18일 작고했다. 그는 통일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평소에 희망했던 독립기념관이 시작되니 마음이 편안하다. 그리고 민족이 통일되는 것을 보고 죽고 싶었는데..."
▲윤치호: 큰아들에게 "너는 자신을 알고 남을 이야기하라. 먼저 배우고 손수 일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범석(독립군 장군):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투쟁했던 그의 유언은 남달랐다.
"나의 생애는 언제나 기복중첩의 생애였다. 그 사나운 바람과 눈보라 곁에서 나는 증오의 철학을 익혔다. 그것은 조국을 괴롭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다. 조국 땅에 한 줌 두엄으로 남기 위해 마음을 썩였다."
▲장면(전총리): 20여명의 친지가 임종을 지켜보았다. 유언이 있느냐고 묻자 "사람은 종교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양심을 지켜라. 유언은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송진우: 정치인이었던 그는 운명의 순간에 아들에게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 약점을 공격하지 말라. 장점을 얘기하라. 소신을 끝까지 밀고 가되 돈에는 청렴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전진한: 그는 가족에게 "노동자로 태어나 노동자로 죽는다.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고 시체는 종이에 싸 달라. 검소 절약해서 살아야 한다"고 유언했다.
▲모택동: 거대한 중국의 통치자였던 그는 큰 나라를 움직인 사람답게 유언했다.
"내 죽으면 내 시체를 화장해서 가루로 만들고, 비행기에 싣고 하늘로 올라가서 전 국토 위에 뿌려 달라. 10억의 중국인과 함께 있고 싶노라"
"야구를 죽게 해선 안되네"
▲에이브라함 링컨: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그는 암살 당했다. 총에 맞아 숨이 떨어지면서 부하 장군에게 "나는 죽더라도 야구는 죽게 해선 안되네.."라고 말했다.
▲김학열(전 경제기획원 장관): 담배를 좋아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에 담배 피우기를 원했다. 그리고 나서 하고 싶은 말을 남겼다.
"나는 내가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하고 간다. 바보처럼 몸을 돌보지 안고 일했기 때문이다. 꼭 몸을 돌보며 일해야 한다. 그리고 난 시골에서 태어나 장관을 했는데 너희는 도시에서 태어났으니 더 훌륭히 되어야 한다. 또 내가 꾸짖은 직원에게 전해 달라. 장래가 촉망되는 직원만 꾸짖었다고."
▲김병로: 가족에게 "법을 익혀 놓으면 정치가나 변호사나 무엇에든지 사용하기에 좋으니 법을 좋아하라"라고 말했다.
▲이상재: 작고하기 하루 전에 두 제자가 문병을 갔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놈 자식들, 너 나 뒈졌나 안 뒈졌나 보러 왔지?"라고 말했다. 그는 야인답게 걸작의 유언을 남겼다.
▲안중근: 32세에 작고한 안의사는 아우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죽은 후에 나의 시체는 대한독립이 회복되게 전에는 고국에 반장 하지 말고 하르빈 공원 부근에 매장하여 세계 만 국민들의 귀감이 되게 하라.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유의 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 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신익희: 그는 아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한가지 명심하라. 남보다 잘 안다고 오만하지 말라. 우월감으로 남을 무시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이 한가지만 깊이 명심하면 어디서나 존경받을 수 있다."
▲조헌: 왜란을 예언한 의병장이었던 그는 "장부가 국난을 당하여 어찌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랴. 이 땅이 나의 죽을 곳이다"고 말했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승훈: 그는 교육자다운 유언을 남겼다.
"내몸은 묻지 말고 뼈를 생물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만지며 공부하게 하라"
▲이승만(전대통령): 초대 대통령이었던 그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유언을 남겼다.
▲민영환: 그는 자결했다. 그의 옷소매 속에는 아래와 같은 유언이 담겨 있었다.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 고? 우리의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아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공병우: 한글 타자기를 발명했던 그는 "내가 죽은 후에 죽었다고 알리지 말라. 내 시신은 학생들의 해부용으로 쓰게 해달라"고 유언, 가족들이 그대로 지켰다.
▲김성수: 평소에 자녀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사람은 항상 제 처소를 지켜야 한다. 제 잠자리를 떠나면 못쓴다."
▲최남선: 가는 자제에게 남길 말을 전했다.
"너희는 정치가가 되지 말라. 의술 같은 기술을 가져 네가 벌어먹고 사는 길이 바로 애국이다."
▲안창호: 한일합방한 일본의 메이지 천왕을 꾸짖는 말로 유언을 대신했다.
"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하수영(가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렀던 그는 "나는 죽으면 생화로 덮인 화관에 들어간 채로 화장되어 깨끗하게 사라지고 싶다"고 유언했다.
▲이정재: 정치 깡패였던 그는 사형되었다. 그는 형장의 이슬이 되기전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내가 기르다시피 한 +++가 배은망덕한 증언을 한 것은 참으로 섭섭한 일이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도 아들이 있는 사람이요, 나도 아들이 있는 사람이니까 아들 대에 가서는 절대로 원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당부해 두고 싶다."
 "최후진술 속에 진실 있다"
▲허태영: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아내에 남긴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여보 당신 부디 몸조심하여 영세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당신에 대한 최소한 생각 입으로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당신은 나를 이해하고 충분히 용서하겠기에 구구한 사과의 말을 안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남편은 국가 민족을 위하여 큰일을 하였다는 것만은 재인식하시고 장래 자녀 교육을 전보다 더 한층 단란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여 주시기를 축원하옵니다. 누구도 원망할 것 없이 모두가 운명이라고 단념하여 주십시오"
▲김재규: 박정희 전대통령을 쏜 그는 1980년 5월24일 삶을 마감했다. 그 전날 가족의 면회에서 유언을 남겼다.
"이 세상에 부끄러운 일을 절대 하지 않았다. 나의 최후진술을 자자손손 전해 다오. 그 속에 나의 진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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